Guyana
가이아나의 역사는 약 35,000년 전 유라시아에서 인류가 도래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주자들은 카리브족(Carib)과 아라와크족(Arawak)이 되었다. 주로 경작자이자 어부들이었던 아라와크족은 카리브 제도라 불리는 섬으로 이주하여 이 지역 전역에 정착했다. 하지만 아라와크 사회의 평온함은 남미 내륙으로부터 호전적인 카리브족이 도착함으로써 파괴되었다. 카리브인들의 호전적이고 폭력적인 북부 이주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15세기말까지 카리브족은 소앤틸리스 제도의 아라와크족 대부분을 대체하였다.
1499년 원주민들이 에세키보강에서 알론소 데 오헤다의 첫 스페인 원정대를 만났다. 그들은 아라와크족이 그들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싸운 카리브족보다 정복하기가 더 쉽다는 것을 깨닫는다. 카리브족의 격렬한 저항은 소앤틸리스 제도에서의 금 부족과 함께 스페인인들이 대앤틸리스 제도 및 본토에 대한 정복과 정착하는 것에 크게 기여했다. 이는 가이아나의 향후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네덜란드인들은 오늘날의 가이아나를 정착시킨 최초의 유럽인들이었다. 16세기 후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는 17세기 초 소앤틸리스 제도의 영국 및 프랑스 식민지와 교역하면서 주요 상업 강국으로 부상한다. 1616년 가이아나에 유럽인 정착촌을 세운 네덜란드인들은 내륙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큰 강에 거점을 세우고 원주민들과 무역을 했다. 하지만 이 것은 초기 목표일뿐 본질은 영토를 획득하는 것에 있었다. 17세기 초, 이들은 관련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먼스터 조약에 의해 네덜란드 주권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1621년 네덜란드 정부는 새로 설립한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로 하여금 에세키보 유역(Esequiba)에 있는 교역소를 완전히 통제하도록 했다. 1627년 베르비체강(Berbice)에 두 번째 식민지를 건설했다. 비록 민간단체의 일반적인 관할하에 있었지만 베르비체라는 이름의 정착촌은 따로 관리되었다. 1741년에 데메라라(Demerara) 정착촌이 건설되었고 1773년에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의 직할 식민지로 부상했다.
네덜란드 식민지 개척자들은 카리브해 지역의 무역에 대한 전망으로 동기부여를 받았으나, 점차 농산물 생산자로서의 지위 변화가 이루어졌다. 농업의 중요성은 1623년 15,000kg의 담배가 에세키보에서 수출되면서 나타났다. 농업 생산성이 증가함에 따라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원주민들은 플랜테이션 농업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고 많은 사람들이 유럽에서 유입된 질병으로 사망했다. 때문에 그들은 아프리카에서의 노예 수입으로 노동력을 확충하기 시작했다.
1660년대까지 노예 인구는 약 2,500명에 달했고 원주민 수는 50,000명으로 추산되었다.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은 식민지 경제의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되었지만 높은 사망률과 암울한 상황은 노예들로 하여금 6건 이상의 반란을 야기했다.
1763년 2월에 시작된 베르비체 노예 봉기(Berbice Slave Rebellion)는 칸제강에 있는 두 농장의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이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여러 농장들이 아프리카 노예들에게 넘어가면서 유럽인들은 도망쳤고 식민지에 정착했던 백인들은 겨우 절반 정도만 남게 된다. 코피(Coffy)가 이끄는 탈출 노예 아프리카인들은 약 3,000명으로 불어났고 유럽인들의 가이아나 지배를 위협했다. 하지만 이 반란군은 주변 유럽 식민지에서 온 군대의 도움으로 패배했다.
1746년 네덜란드 정부는 데메라라강 인근 지역을 영국 이민자들에게 개방한다. 소앤틸리스 제도의 영국 농장주들은 열악한 토양과 침식에 시달렸고 많은 사람들은 더 풍부한 토양과 토지 소유권에 대한 약속에 의해 네덜란드 식민지로 유인되었다. 어찌나 많은 수가 유입되었는지 1760년경에는 데메라라 내의 유럽 인구 대다수를 차지했다. 데메라라와 에세키보에서 경제 성장이 가속화됨에 따라 농장주들과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 사이의 관계에 긴장감이 나타났다. 행정 개혁을 위한 정부 비용의 증가는 세금 인상으로 이어졌고 그로 인해 농장주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781년 네덜란드와 영국 본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여 영국은 베르비체, 에세키보, 데메라라를 점령했다. 몇 달 후, 프랑스는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고 식민지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프랑스는 2년의 통치기간 동안 데메라라강 어귀에 새로운 마을인 롱샹(Longchamps)을 건설했다. 1784년 네덜란드의 영향이 재회복되었을 때, 그들은 식민지의 수도를 롱샹으로 옮겨 그곳의 이름을 스타브룩(Stabroek)으로 바꾸었으며 다시 이 수도는 1812년에 영국에 의해 조지타운(Georgetown)으로 개명되었다.
네덜란드의 복귀는 에세키보 및 데메라라 농장주들과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 사이의 갈등을 재점화시켰다. 식민지 주민들은 네덜란드 정부에 사법과 세금 문제에 대한 불만을 고려해 달라고 청원했다. 이에 대응하여 특별 위원회가 임명되었고 시정 개념 계획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네덜란드 위원회는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의 행정에 대해 매우 불리한 보고를 하고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따라서 회사의 헌장은 1792년 만료되었고 에세키보와 데메라라에서 계획이 실행되었다. 이들은 네덜란드 정부의 직할령이 되었으며 베르비체는 별개의 식민지 지위를 유지했다.
1795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점령함에 따라 영국은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고 1796년 바베이도스에서 네덜란드 식민지를 점령하기 위한 원정군을 파견했다. 영국은 가이아나에 무혈입성 하였으나 네덜란드 식민지의 지방 행정은 중단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다.
1796년부터 1802년까지 영국 산하의 베르비체, 데메라라, 애세키보 연합 식민지는 아미앵 조약에 의해 다시 네덜란드로 반환되었다. 하지만 다시 전쟁이 재개되자 영국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1814년 공식적으로 영국에 합병된 세 식민지는 영국령 가이아나(British Guyana)로 통합되었다.
196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가이아나는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정부가 들어섰고 이후 민주적으로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언어는 영어가 공용어이며 인근 카리브권 국가들과 밀접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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