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nique
서인도 제도 및 앤틸리스 제도에 속하는 대부분의 섬들과 마찬가지로 130년경 남아메리카의 아라와크족(Arawak)이 마르티니크 섬으로 이주해 왔다. 295년 펠레(Pelée) 화산의 폭발로 인구가 감소했지만, 400년경까지 인구를 회복했다. 그들은 대부분 마르티니크 남부의 강 인근에 모여 살았다. 하지만 600년경 호전적인 카리브족(Carib)이 섬에 도착하면서부터 아라와크족은 대부분 말살되었고 다음 몇 세기에 걸쳐 동화되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그의 두 번째 항해 중 히스파니올라 섬(현 아이티 & 도미니카 공화국)을 통과할 때 아라와크족으로부터 여성들로만 채워져 있는 어떤 섬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다. 때문에 그곳을 "Isla de las Mujeres", 즉 여성들의 섬이라 불렀으며 마티니노(Matinino)라고 번역했다. 1493년 콜럼버스는 오늘날 마르티니크의 까르베(Carbet) 코뮌에 해당하는 지역에 상륙하여 원주민들과 처음으로 접촉했다.
스페인인들은 대인틸리스 제도 및 신대륙에 정착한 최초의 유럽 정착민들이었지만, 소앤틸리스 제도는 너무 작고, 호전적인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여 버렸다. 반면 네덜란드인과 프랑스인 그리고 영국인들은 16세기에서 17세기 초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교역하기 위해 종종 그곳에 들렀으며 지리적으로 요충지에 있어 신대륙으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물과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1635년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은 아메리카 제도 회사(Compagnie des îles de l’Amérique)를 설립하고, 롤리브(Messrs l’Olive) 및 뒤플씨(Duplessis)와 계약을 맺어 프랑스 왕실에 속한 카리브 제도를 대신 통치하게했다. 또한 리슐리외는 해적이자 모험가이던 피에르 벨랑 데스낭뷕(Pierre Belain d’Esnambuc)으로 하여금 마르티니크로 향하라고 지시했다.
데스낭뷕은 롤리브와 뒤플씨의 과들루프 통제권을 탐내다가 쫓겨났다. 때문에 그는 리슐리외의 지시를 받고 곧바로 지정학적, 전략적 지역인 마르티니크를 점령하기 위해 빠르게 출발했다. 그는 생 크리스토프(Saint Christophe) 제도에 있던 약 150명의 프랑스인 정착민과 함께 섬의 서쪽인 생 피에르(Saint Pierre)에 상륙하여 프랑스의 왕과 아메리카 제도 회사를 대신하여 섬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정착민들은 700병으로 불어났다.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생 피에르 주변의 땅을 개간하여 마니옥과 감자를 심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먹고사는데 여유가 생긴 뒤로는 로쿠, 인디고, 담배, 카카오, 면화 등의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상인을 비롯해 외국 상인들은 이 이국적인 상품들을 사기 위해 섬에 자주 방문하여 식민지는 번영하기 시작했다.
1640년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 그리고 바베이도스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제도 회사는 프랑스 루앙에 거주하던 네덜란드 출신의 노르만인 다니엘 트레젤(Daniel Trézel)과 계약을 체결하여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서인도제도로 떠났다. 두 아들 중 프랑수아(François)는 마르티니크로, 사뮈엘(Samuel)은 과들루프로 데려가 설탕 공장을 설립했다.
소규모의 설탕 공장에서는 소와 말 또는 노새를 동력으로 사용하여 사탕수수를 압착했으며, 압착되어 나온 사탕수수 주스를 추출 및 가열하여 정제된 당밀과 설탕을 얻어냈다. 설탕은 주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으로 수출되었으며, 부산물인 당밀은 럼을 증류하는데 사용되었다.
브라질 북부에 위치한 뉴 홀란드(New Holland)에서의 설탕 생산 붕괴는 설탕 가격 인상으로 이어졌고, 이는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 그리고 바베이도스에서의 더 많은 설탕 생산을 촉발했다. 플랜테이션 초기에는 섬의 노동력을 비롯해 가난한 아일랜드인들, 유럽에서 서인도제도로 추방된 이주민 등 백인들 위주의 노동 착취가 일상이었다. 특히 담배, 면화, 인디고 등 작물의 과잉 생산으로 이어져 상품의 가격이 급락했다.
1638년 100명의 흑인 노예를 인도받는 계약을 체결하고, 루이 13세에 의해 승인되었다. 1641년 영국과 네덜란드 선박은 마르티니크로 노예를 데려왔다. 오랫동안 백인 노동자들은 플랜테이션에서 그들과 함께 일했고, 때로는 서면으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노동집약적이긴 하지만 설탕은 거래하기에 수익성이 좋은 제품이었고, 마르티니크에서의 작물재배는 결국 설탕으로 집중되었다. 아프리카에서 구입한 흑인 노예들은 마르티니크의 플랜테이션에 계속해서 팔려나갔다. 베케(Békés)로 알려진 프랑스 식민지 정착민과 이들 흑인 아프리카인 사이의 혼합된 문화는 크레올(Créole) 문화로 이어졌다.
바베이도스에 주둔하던 영국 군대는 계속해서 프랑스의 식민지인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결국 7년 전쟁(1756 ~ 1763)에서 영국 군대는 마침내 섬을 점령하여 마르티니크는 합병될 위기에 처했다. 프랑스 왕실에 있어서 이 두 섬을 통한 설탕 무역은 대단히 중요했기 때문에 파리 조약(1764)을 통해 캐나다 식민지의 소유권을 포기하고 섬을 되돌려받았다.
프랑스혁명(1789) 후 프랑스 입법부는 모든 유색인종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마르티니크 제언의회도 이 법을 공포하는데 동의했으나, 법령이 마르티니크에 전달되기 전에 영국이 섬을 침공하여 점령했다. 영국은 프랑스 군주제가 재건될 때까지 마르티니크를 영국 관할 아래 두는 협정에 서명했다. 영국 점령군은 프랑스 왕실주의자들로 하여금 노예를 포함한 재산과 지위를 되찾게 하고, 계속해서 노예를 소유할 권리를 부여했다.
1802년 아미앵 조약에 따라 섬은 프랑스로 반환되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식민지에서 노예 제도를 복원했지만, 마르티니크에서는 영국의 점령으로 인해 실제로 폐지된 적은 없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계속된 세력 싸움, 노예 반란, 허리케인과 지진 같은 대재해로 인구가 급감했다.
1848년 프랑수아 오귀스트 페리뇽(François Auguste Perrinon)은 마르티니크 식민지 개척자 위원회의 의장이 되었다. 그는 프랑스 제국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하는 법령을 가지고 마르티니크 총독으로 임명되어 향했다.
1853년 노예 제도 폐지 이후 인도에서 연한계약 노동자들이 마르티니크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1870년까지 사탕수수 밭은 마르티니크 경작지의 약 57%를 덮었다. 불행하게도 설탕 가격의 하락은 많은 소규모 설탕 공장들의 합병으로 이어졌다. 생산자들은 이런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설탕 대신, 럼 생산으로 전환했다. 프랑스가 제3공화국을 수립하고 마르티니크는 국회에서 대표권을 얻게 되었다.
1902년 펠레(Pelée) 화산의 폭발로 마르티니크의 인구 대부분이 사망했다. 상업 중심지였던 생 피에르 시는 완전히 파괴되어 수도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렸고, 도시가 재건된 뒤 포르 드 프랑스(Fort-de-France)로 중심지가 바뀌었다. 많은 럼 증류소들은 파산하여 부유한 사업가들에 인수되었다. 덕분에 기존의 구식 설비 대신 최신 기계들을 들여 현대화된 증류소로 재건되었다. 본격적으로 많은 양의 럼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특히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마르티니크 당국은 프랑스 본국으로부터 많은 럼 공급을 요구받았다. 설탕 공장 대부분이 증류소로 전환되면서 생산량이 기존의 두 배가 되어 지역 경제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1921년 세계적으로 설탕 시장이 붕괴되면서 많은 소규모 증류소들이 다시 파산 또는 인수 & 합병되었고, 경작자들은 바나나와 같은 새로운 작물을 찾아야만 했다.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1943년 중반까지 마르티니크는 공식적으로 친 비시였다. 섬은 영국의 왕립 해군에 의해 봉쇄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5년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에메 세제르(Aimé Césaire)가 포르 드 프랑스의 시장이자 마르티니크의 프랑스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공산당원이었으나, 1956년 헝가리 혁명에 대한 탄압을 본 그는 공산당을 탈당했다.
이후 수 십 년에 걸쳐 시장직을 맡았으며, 의회의 의원으로서 프랑스의 식민지로 남는 것을 고수했다. 때문에 독립을 주장하는 마르티니크 정치인들은 그를 비판했다.
1946년 프랑스 국회는 마르티니크를 프랑스 식민지에서 DOM(Département d’Outre-Mer) 부서로 전환하기로 하는 투표를 진행하여 만장일치를 받았다. 과들루프, 레위니옹, 프랑스령 기아나, 마요트와 함께 마르티니크는 프랑스의 해외 레지옹(Région)이 되었으며, 모든 부서와 법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데파르트망(Département)으로서 프랑스 하원 4석과 상원 2석을 선출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1962년 마르티니크에서 OJAM(마르티니크의 반식민주의 청년 조직)으로 하여금 최초의 독립 주장이 일어났으나, 국가 안보를 훼손한 죄로 수감되었다. 2년간 재판을 끝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1997년 분리주의자인 알프레드 마리 잔느(Alfred Marie-Jeanne)가 마르티니크의 의원으로 선출된 후 1998년 지역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것은 마르티니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10년 국민 투표를 통해 “마르티니크를 헌법 74조에 의해 규율되는 COM(해외 영토 집합체)로 전환하고, 공화국 내에서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는 특정 조직을 갖는 것을 승인하는가?”에서 68.3%의 찬성표를 받아 단일 커뮤니티 상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각료회의에 제출되었다. 이후 2016년 마르티니크 부서는 공식적으로 마르티니크 영토 집합체가 되었으며, 프랑스 공화국의 단일 영토 집합체로 인정되었다.
마르티니크는 유럽 연합 특수 회원국으로 지정되어 유럽 연합의 모든 정책과 계획에 참여하고, 그 행동을 규정하는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 연합의 법률이 반드시 모든 회원국의 모든 지역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역사상 지리적, 정치적 이유로 회원국의 일반 지역과 달리 본국 정부와 유럽 연합과 다른 관계를 가지는 특수한 지역으로 간주된다. 때문에 유럽 연합의 참여하지 않는 몇몇 국가도 존재한다. 또한 이들 지역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유럽 연합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는 규정이 있다.
마르티니크를 비롯한 과들루프, 프랑스령 기아나, 레위니옹, 마요트는 유로(EUR)가 법정 통화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럽 연합의 관세 동맹에 참여하고 있다. 반면 셍겐 조약에서 정한 부가가치세 영역에서는 제외되어 있다.
마르티니크는 유럽 및 프랑스의 재정 지원으로 비교적 다른 서인도제도의 나라들에 비해 높은 생활수준을 영위하고 있다. 1차 산업인 작물 재배와 3차 산업인 관광 및 서비스업 비중이 높아 청년 실업률이 매우 높다. 이들은 프랑스 본토보다 더 낮은 생활수준에 불만을 느낀다고 한다.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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