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k Daniel's Distillery
19세기 중반, 북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혈통을 가졌지만 정확한 생일은 알려지지 않은 재스퍼 뉴턴 잭 다니엘(Jasper Newton Jack Daniel)이 태어났다. 아버지 캘러웨이 다니엘(Calaway Daniel)은 이후 마틸다 반 잔트와 재혼한 뒤 남북전쟁 중 미국 남부 연합군의 군인으로 복무하였으나 폐렴으로 사망했고 계모인 마틸다가 잭 다니엘을 핍박하자 그는 집을 나와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되었다. 1864년, 신실한 루터교 목사이자 증류업자였던 댄 콜(Dan Call)에게 거두어진 잭 다니엘은 그의 농장에서 잡일을 하거나 증류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불과 3년 만에 그는 작은 증류소의 파트너가 되었다.
1875년, 형제자매들과 오랜 분쟁 끝에 아버지의 재산 일부를 상속받은 잭 다니엘은 댄 콜과 함께 위스키 증류소를 설립하고 정부가 공식적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후 댄 콜이 종교적인 신념의 이유로 일련의 활동을 멈추고 사업 지분을 모두 잭 다니엘에게 매각했다. 새롭게 설립된 "Jack Daniel's Distillery No.7"에서 그는 네이선 니어스트 그린(Nathan Nearest Green)이라는 아프리카계 흑인 노예를 만나 증류소의 운영 업무와 증류 기술을 배우게 된다. 특히 네이선은 물을 숯으로 정수하던 서아프리카의 관행을 위스키 생산기술에 접목하여 단풍나무 숯 여과 또는 차콜 멜로잉(Charcoal Mellowing)이라는 공정을 도입함으로써 잭 다니엘의 위스키를 경쟁사들과 차별화하는, 보다 뚜렷하고 깨끗한 풍미를 부여했다.
뛰어난 맛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 잭 다니엘의 위스키는 린치버그를 포함한 주변 마을에 팔리기 시작했고, 큰돈을 벌어들인 그는 1884년경 댄 콜로부터 증류소를 완전히 인수한 후, 눈여겨보고 있던 케이브 스프링 할로우(Cave Spring Hollow) 부지를 매입했다. 이 부지에 위치한 샘은 매분 지하에서 약 800갤런 상당의 물을 끌어올릴 수 있었고 석회암으로 자연 여과되어 깨끗한 물을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증류소 부지로 선정하여 이전했다. 증류소 통제권을 완벽하게 쥐게 된 그는 네이선을 마스터 디스틸러로 임명하고 아들들인 루이즈와 엘리 그리고 조지를 사업에 합류시켰다.
1897년, 위스키를 벌크로 판매하거나 개별 식료품점에서 통에 담던 당시에 잭 다니엘은 공정성과 성실함을 전달하기 위해 상징적인 정사각형 병에 직접 병입 하여 "Old No.7"이라는 브랜드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1904년, 그의 위스키가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에서 위스키 부문 금메달을 수상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다. 사업은 번창했지만 잭 다니엘에게는 이것을 물려줄 아내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여동생이 낳은 두 조카를 데려와 운영케 했다. 첫째인 레뮤얼 오스카 렘 모틀로우(Lemuel Oscar Lem Motlow)가 증류소의 사업 부문을 운영했고, 둘째인 제스 버틀러 제스 모틀로우(Jesse Butler Jess Motlow)가 잭 다니엘의 도움을 받아 생산 부문을 담당했다. 1907년, 금고를 차서 발가락이 부러진 후유증으로 잭 다니엘은 증류소를 조카들에게 상속한 뒤 1911년에 사망했다. 이후 렘은 사업의 회계를 담당했으며 제스는 증류소의 마스터 디스틸러가 되었다.
1910년, 테네시주가 금주법을 통과시키면서 잭 다니엘을 포함한 많은 증류소들의 증류를 불법화했다. 이에 렘 모틀로우는 테네시 대법원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법원은 금주법을 합헌이라 결정하면서 좌절되었다. 회사가 어려움을 겪자 렘 모틀로우는 증류 사업체와 수반되는 위스키 재고 대부분을 미주리주의 세인트루이스나 앨라배마주의 버밍햄으로 옮기려 했으나 1919년, 알코올 생산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볼스테드법(Volstead Act.)이 제정되고 이듬해 1월 17일부터 전국적으로 금주법이 확산되면서 다시 좌절되었다. 오직 6개의 회사만이 의료용 위스키 또는 알코올을 생산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으나 "Jack Daniel's Distillery"는 그러지 못했다. 합법적으로 판매할 수 없게 된 엄청난 위스키 재고는 연방 정부가 관리하는 창고에 보관된다.
1923년, 어느 날 한 강도무리가 연방 정부가 관리하는 보세창고에 숨어들어 보관되고 있던 893통의 잭 다니엘 버번 위스키를 호스로 모조리 빼가고 물로 채워두었으며 하나의 위스키 배럴만을 남겨두었다. 연방의 수사관들은 이 사건의 배후로 렘 모틀로우를 지목하고 밀수 혐의로 기소했다. 이듬해 법정에 출두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살인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법정 다툼을 끝내고 테네시주 상원의원이 된 그는 1933년 전국적으로 금주법이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주법을 계속 이어가는 테네시주의 관행을 없애기 위해 최전선에 섰다. 그의 추가적인 로비 덕분에 테네시에서 위스키를 생산하여 다른 주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 통과되면서 잭 다니엘 위스키를 린치버그에서 다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1938년, "Jack Daniel's Distillery"가 재가동되면서 사각 유리병에 담긴 잭 다니엘 위스키 생산이 다시 재개되었으며 그가 개발한 "Tennessee Sour Mash Whiskey"는 1992년까지 생산되어 유명세를 떨쳤다. 1941년, 그동안 마스터 디스틸러로 남아 있었던 제스 모틀로우가 그 자리를 잭 다니엘의 조카딸인 렘 톨리(Lem Tolley)에게 물려주었다. 또한 렘 모틀로우는 아들 리거 모틀로우(Reagor Motlow)와 협력하여 미국 정부와의 긴밀한 협상 끝에 "Jack Daniel's Tennessee Whiskey"는 링컨 카운티 프로세스(Lincoln County Process) 공정을 통해 생산된, 버번이 아닌 테네시 위스키 라벨이 붙은 별도의 제품으로 공식 승인을 받았다.
1942년,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전쟁 중 알코올을 군사 및 의학적 목적으로 우선 사용하도록 지시하면서 이로 인해 상업적 증류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1947년, 전쟁이 끝나 회복기에 들어서면서 양질의 옥수수가 공급됨에 따라 "Jack Daniel's Distillery"도 생산이 재개되었다. 같은 해에 렘 모틀로우가 사망하자 사업의 지분은 자녀인 로버트(Robert), 리거(Reagor), 댄(Dan), 코너(Conner), 메리(Mary)에게 각각 분배되었고,
이후 "Jack Daniel's Distillery, Lem Motlow, Prop, Inc."로 법인화된 회사에 첫째인 리거가 사장을 취임하여 아버지의 위스키 생산 전통을 이어나가고 생산량을 증가시켰다.
1956년, 모틀로우 가족은 회사의 지분을 "Brown-Forman"에게 매각했다. 회사가 인수된 후에도 렘 톨리는 마스터 디스틸러로 남았지만 은퇴를 고려하여 1964년경 제스 갬블(Jess Gamble)로 교체되었고, 2년 뒤에는 프랭크 밥(Frank Bob)으로 바뀌었다. 1968년부터 "Jack Daniel's Distillery"에서 일하며 발효, 곡물 제분, 효모 사용 그리고 증류에 대해 많은 경험을 쌓은 지미 베드포드(Jimmy Bedford)가 1988년에 마스터 디스틸러로 임명되었다. 임기 동안 그는 "Gentleman Jack", "Jack Daniel's Single Barrel Select"와 같은 제품을 출시하여 제품군의 다각화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2008년경 성희롱 소송에 연루된 그는 강제로 은퇴당하고 이듬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2008년, 제프 아넷(Jeff Arnett)이 증류소의 마스터 디스틸러로 임명되어 일곱 번째 책임자가 되었다. 그가 재직하는 동안 "Flavored Whiskey"를 비롯해 다른 매쉬빌을 사용한 "Jack Daniel's Single Barrel Rye", "Jack Daniel's Tennessee Rye", "Sinatra Select" 등 많은 제품군이 추가되었다. 2014년, 버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자 오크통의 수요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당시 산하의 다른 증류소들도 "Brown-Forman Cooperage"의 공급에만 의존해야만 했기 때문에 회사는 오직 "Jack Daniel's Distillery"에만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Jack Daniel's Cooperage"를 앨라배마주 로렌스 카운티에 설립하여 위스키 생산량을 끌어올렸다. 2020년, 제프 아넷이 은퇴하고 이전 책임자였던 프랭크 바보의 손자 크리스 플레처(Chris Fletcher)가 새로운 마스터 디스틸러로 임명되어 일하기 시작했다.
증류소는 부지 내에 위치한 케이브 스프링 할로우 샘에서 분당 약 800갤런의 물을 끌어올려 생산 전반에 활용한다. 이 물은 석회암에 의해 자연적으로 여과되어 철분을 제외한 다양한 미네랄이 풍부하다. 원료의 경우 앨라배마 북부, 켄터키 남부, 일리노이 남부 지역에서 재배 및 수확된 1등급의 노란 옥수수와 스칸디나비아 방면에서 수입한 호밀 그리고 다양한 지역에서 몰트를 공급받는다.
- Bourbon Mash Bill : Corn 80%, Rye 8%, Malted Barley 12%
- Rye Mash Bill : Rye 70%, Corn 18%, Malted Barley 12%
해머밀(Hammer Mill)을 통해 각 곡물을 개별적으로 으깬 후 매쉬 쿠커(Mash Cooker)에서 고온으로 가열한다. 이 공정으로 매쉬(Mash)가 생성되는데, 각 매쉬는 2가지 곡물 혼합 비율에 의해 조합된 후 발효 탱크로 옮겨져 효모가 활동할 수 있는 적정 온도까지 냉각된다. 증류소는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독점적인 효모 균주를 사용하지만 주로 이전 배치의 잔류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워 매쉬를 0 ~ 30% 정도 혼합하여 약 6일간 발효시킨다. 발효가 마무리되면서 저도수의 워시(Wash)가 생성된다.
증류소 내부의 스틸룸에는 100피트 높이의 컬럼 스틸 6개가 있다. 일반적으로 컬럼 스틸 1회에 더블러(Doubler)라 불리는 팟 스틸에 1회, 총 2회 증류를 수행하는 대부분의 버번 위스키 증류소와는 달리 잭 다니엘스 증류소는 증류기를 여러 번 거치는 대신 내부에 많은 구리 플레이트를 설치하여 한 번만 통과하도록 한다. 워시가 연속식으로 1회 증류되면서 알코올 도수 약 70%의 화이트독(White Dog) 또는 뉴 메이크 스피릿이 탄생한다.
이 증류액은 즉시 10피트 높이의 설탕단풍나무 숯에 떨어트려 여과시킨다. 회사는 이것을 링컨 카운티 프로세스라 부르는데, 이 과정을 불순물이나 불편한 맛을 제거한다. 한 번 통과하는 데 약 3 ~ 5일이 소요된다. 여과가 끝난 증류액은 법적 수준에 맞게 알코올 도수 약 62.5%로 약간의 가수를 거친 뒤 "Jack Daniel's Coooperage"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태움 수준 #3에 해당하는 아메리칸 오크에 통입한다.
통입을 마친 오크통은 증류소가 소유한 90개의 릭하우스(Rickhouse) 중 하나로 운송되어 안치된다. 첫 해에 약 11 ~ 12%의 엔젤스 셰어가 일어나고, 그 뒤로는 해마다 약 4 ~ 5% 정도로 진행된다. 어떤 제품군에 활용할 오크통이냐에 따라 숙성 위치는 변경된다. 핵심 제품군인 "Jack Daniel's Old No.7"의 경우 한 배치에 약 175 ~ 200개의 오크통을 섞어 일관된 풍미 프로파일을 만든다.
Review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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