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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니크 아그리꼴 럼의 역사 (Rhum Agricole)

by Y's Spirits Archive 2023.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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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탕수수의 재배는 인도부터 시작해서 중동, 이집트, 지중해 연안에 걸쳐 몇 세기 동안 이어졌다. 15세기에는 스페인의 카나리아 제도와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아조레스, 상투메, 프린시페 섬부터 새로 건설된 식민지까지 널리 퍼졌다. 신대륙은 주로 브라질로 시작해서 앤틸리스제도와 히스파니올라섬까지 이어졌다.

 

 1618년 브라질과 소앤틸리스제도를 떠돌던 익명의 프랑스 해적은 카리브해 인디언들이 정원에 카사바나 감자 또는 파인애플 심는 방법을 알고, 그것에서 추출한 즙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탕수수 주스로 만든 알코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사탕수수 주스와 바나나를 섞은 와인만을 언급했다.

 

 

 구대륙에서의 비카톨릭 신자 박해는 이들로 하여금 제3국으로의 이민을 강요했다. 이미 16세기에 오랫동안 설탕 생산 기술을 알고 있었던 마라노(Marrano)의 유대인들은 포르투갈을 떠나 브라질로 피신해야 했으며, 이는 최초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큰 수확을 올릴 수 있었던 요인중 하나가 되었다. 새로운 식민지에는 다양한 분야의 귀중한 지식을 보유한 장인뿐만 아니라 큰 야망을 가진 부유한 상인들도 오며 이주 운동이 추진력을 가지게 되었다.

 

 신대륙에서의 사탕수수 산업은 1532년 브라질에 정착한 포르투갈인 상 빈센트(São Vicente)로부터 시작하여 살바도르 다 바이아(Salvador da Bahia) 지역까지 널리 퍼졌다. 당시 그들은 “Terred”라는 설탕으로 유명했는데, “Terrage”는 설탕을 점토로 덮어서 희게 만드는 작용으로 더욱 정교하게 정제된 설탕을 얻을 수 있게 하여 고부가가치의 제품을 만들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정제, 시럽화, 발효 등의 언급은 없었다. 설탕 시럽의 증류에 대한 최초의 지식은 “Gerebita” 또는 “Aguardiente”로 알려진 사탕수수 브랜디가 오랫동안 브라질에서 생산되었다는 것에 기인한다.

 

 1580년대부터 남아메리카 북부 해안에 이미 정착했었던 네덜란드인들도 이 새로운 무역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때문에 1630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자회사였던 서인도회사(West-Indische Compagnie)가 살바도르 다 바이아와 나탈(Natal) 지역을 포르투갈로부터 빼앗았다. 하지만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끝나는 해인 1654년에 네덜란드의 브라질 식민지는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점령하기 시작했다.

 

 1652년 수백 명의 네덜란드 난민들은 그 지역을 다시 떠나야 했고, 아주 자연스럽게 서인도제도로 향했다. 그들 중에는 설탕 정제 기술과 설탕 공장 소유주도 있었다. 당시 마르티니크는 카톨릭 교도들이 지배하고 있어서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고, 결국 이들은 과들루프(Guadeloupe)로 향했다.

 

 

 프랑스령 서인도제도에서 사탕수수로 오드비를 생산한 최초의 언급은 163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메리카 제도 회사(Compagnie des îsles d’Amérique)와 계약을 한 다스낭뷕(d’Asnambuc)은 프랑스 이주민들을 이끌고 마르티니크(Martinique)에 정착했다. 오드비 생산을 위해 파귀(Mr. Fagues)에게 설탕 산업을 위한 자본과 인력을 동원하게 했고, 설탕 생산을 위한 설비를 설치하는데 다니엘 트레젤(Daniel Trézezl)과 그의 아들 프랑수아(François)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마르티니크에서의 고급 정제 기술의 발달로 사탕수수 시럽의 양을 상당히 늘릴 수 있게 되었으며, 다른 섬에 비해 시럽의 가용성이 더 높아졌다. 하지만 이 기술은 프랑스 낭트의 증류업자들로부터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따라서 1680년 프랑스 재무장관이었던 콜베르(Colbert)가 식민지의 설탕을 외국의 경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취했던 일련의 조치를 재고했다. 이 때부터 식민지산 정제 설탕에 관세가 부과되어 프랑스 본토에서 정제된 것보다 더 높은 가격이 책정되었다. 이 조치는 그들이 예상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서인도제도의 농장주들은 시럽으로 사탕수수 브랜디를 계속 만들었고 이는 지역 농장 경제를 빠르게 장악했다. 이것은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서인도제도의 원당 정제가 증가하면서 사탕수수 시럽과 오드비의 경쟁이 가속화되었다. 증류업자들의 청원은 결국 프랑스 본토와 식민지 사이 경쟁의 본질이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페르 라바(Père Labat)로 잘 알려진 장-밥티스트 라바(Jean-Baptiste Labat) 신부가 1693년 서인도제도로 자발적인 임무를 가지고 떠났다. 1694년 마르티니크에 상륙하여 섬의 북쪽에 위치한 마쿠바(Macouba) 교구에 합류했다.

 

 그는 생트 마리(Sainte-Marie) 북쪽에 위치한 퐁 생-자크(Fonds Saint-Jacques) 수녀원 소유의 설탕 공장을 관리 및 개발하고 설탕 제조 과정을 최적화하였으며, 타피아(Tafia) 제조 공정을 완성했다. 그는 유럽으로 돌아오면서 집필한 "Nouveau Voyage aux Isles Françoises de l’Amérique"를 작성함으로써 설탕을 제조한 후 얻은 증류액이 그 자체로 제품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입증했다.

 

 17세기 말 유럽의 전쟁은 프랑스 와인 산업에 비극을 안겨다 주었다. 영국에 대한 와인 공급은 프랑스에서 포르투갈(Vinho do Porto)로 옮겨졌고, 많은 프랑스 와인 생산자들이 곤경에 처했다. 산업을 보호해야 했던 왕실은 당시 와인 및 오드비의 경쟁 상대이던 사탕수수 브랜디와 설탕 그리고 시럽에 대해 반입 금지 법령을 공포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만들기 시작했다. 1763년 파리 조약이 영국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루이 15세는 서인도제도에서 생산된 타피아를 뉴잉글랜드로 수출하는 것을 승인했다. 그러나 프랑스 본토에는 여전히 금지되었다.

 

 1777년 금지령이 해제됨으로써 사탕수수 브랜디가 다른 증류주보다 해롭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점차 어두운 이미지를 벗게되었다. 영국 식민지에서는 산업 혁명으로 인한 증류 기술의 발달로 더 많은 양의 럼을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지만, 프랑스 식민지에서 증류된 대부분의 럼은 라바 신부 이래로 거의 발전하지 않은 증류 기술을 사용하여 럼을 생산했다.

 

 장 다부지에(Jean d’Arboussier)는 마르티니크의 라 모니(La Mauny) 사유지에 1749년 설탕 정제소를 세웠고, 1820년에는 증류소를 설립했다.

 

 생트-마리의 수녀원 병원은 생 피에르(Saint Pierre) 시에 위치한 트루 드방(Trou-Devant) 사유지로 이전했다. 국가가 약속한 기부금은 점차 줄어들었기 때문에 병원장이자 학식 있는 연금술사였던 에드몽 르페뷔르(Edmond Lefébure) 신부는 그곳에서 고도로 개선된 타피아를 생산했고, 가장 잠재적인 고객인 뉴잉글랜드의 영국인과 정착민들을 더 잘 끌어들이기 위해 세인트 제임스(Saint James)라는 상업적인 이름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1770년 라까주(L'Acajou)트루아 리비에르(Trois Rivières)에 설탕 정제소가 건설되었다. 라쥐스 남작(Baron de Lajus)은 1774년에 작은 설탕 정제소가 달려있는 집을 구입하여 르 까르베(Le Carbet)에 정착했다. 이는 자크 발리(J.Bally) 브랜드로 이어지게 된다.

 

 1784년 전쟁에서 돌아온 디용(Dillon)은 동명의 증류소를 설립했고, 1790년 앙투안 르루-프레빌(Antoine Leroux-Préville)이 마쿠바 근처의 설탕 공장을 인수하여 퐁-프레빌(Fonds Préville) 증류소를 설립했다.

 

 

라 모니 & 트루아 리비에르(La Mauny & Trois Rivières)

Distillerie La Mauny 1749년 프랑스 왕의 고문이자 브르타뉴 귀족인 페르디낭 풀랭(Ferdinand Poulin)이 마르티니크에 도착했다. 그는 섬 남쪽 리비에르 필로트(Rivière-Pilote)에 위치한 농장 소유주의 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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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제임스 & 자크 발리(Saint-James & J.Bally)

Distillerie Saint-James (Sainte-Marie) 세인트 제임스(Saint James)의 정확한 명칭은 레 플랑타시옹 생 제임스(Les Plantations Saint-James)로 정확한 역사나 기원은 없다. 1713년 브랜디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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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파즈 & 디용(Depaz & Dillon)

Distillerie Depaz 데파즈(Depaz)의 발상지인 라 몽타뉴(La Montagne)는 원래 섬의 초대 총독인 자크 뒤파르케(Jacques Duparquet)가 1651년 설립한 농장이었다. 펠레(Pelée) 화산의 장엄한 옆면에 달라붙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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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 장-마리 마르뗑 & 퐁-프레빌(Rhum J.M & Fonds-Préville)

Rhum J.M / Distillerie Fonds-Préville 펠레(Pelée) 화산 기슭의 로슈(Roches)와 마쿠바(Macouba) 두 강을 끼고 있는 164헥타르의 사유지를 1790년 앙투안 르루 프레빌(Antoine Leroux-Préville)가 인수하여 처음으로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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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 혁명으로 인한 설비의 기계화, 증기 기관의 발명, 증류 기술의 진보는 19세기 럼 산업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었다. 철도의 건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설탕 공장 그리고 설탕 공장에서 증류소까지의 거리를 획기적으로 줄였고, 이는 비용의 절감으로 나타났다. 뜨거운 물을 가열하여 나오는 압력으로 톱니바퀴를 움직였으며, 그 동력은 압력 보일러의 사용과 연속식 증류탑(Continous Column Still)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19세기 초 사탕무에서의 설탕 추출법으로 인해 전세계적인 설탕 위기가 일어났다. 때문에 마르티니크의 농장주들은 설탕을 헐값에 팔아버리는 대신, 사탕수수 주스를 직접 발효하고 증류하여 고부가 가치의 아그리꼴 럼(Rhum Agricole)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 라 모제(La Maugée) 지역에 설탕 공장과 사유지가 건설 되었다. 이는 1883년 아비타시옹 생테티엔느(Habitation Saint-Étienne/HSE) 증류소로 이어진다.

 

 1842년 샤를 앙리(Charles Herni)가 라 장베트(La Jambette)라는 설탕 공장과 증류소를 설립했다. 1905년에 파산한 라 장베트를 앙리 도르무아(Henri Dormoy)가 매입하여 라 파보릿트(La Favorite)로 이름을 바꾸고, 현대화된 증류소로 개조했다. 1887년 오메르(Homère)는 라까주(l'Acajou) 사유지를 구입하여, 1917년 클레망(Clément) 증류소를 설립했다.

 

 

르 시몽 & 아비타시옹 생테티엔느(Le Simon & Habitation Saint-Étienne & A1710)

Domaine de l'Habitation du Simon / Distillerie du Simon 프랑스 건축가 에밀 부르쥬노(Émile Bourgenot)는 뤼도빅 브리에르 드 릴(Ludovic Brière de l'Isle ) 시장의 도움을 받아 마르티니크의 설탕 공장 건설을 위임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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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파보릿트 & 아비타시옹 라 파보릿트(La Favorite & Habitation La Favorite

Distillerie La Favorite 라 파보릿트(La Favorite)는 포르 드 프랑스(Fort-de-France)와 르 라멍뗑(Le Lamentin)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마르티니크에서 유일하게 가족이 운영하는 두 개의 럼 증류소 중 하나다.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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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망 & 도멘 드 라까주(Clément & Domaine de l'Acajou)

Habitation Clément 1770년 작은 주거지와 농장으로 시작한 아비타시옹 클레망(Habitation Clément)은 여러 인수 및 합병 과정을 거쳤다. 오메르 클레망(Homère Clément)은 원래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나 파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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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0년경 마르티니크는 세계 럼 생산량의 1/3를 차지하는 세계 최고의 럼 생산지가 되었다. 때문에 섬의 사탕수수가 충분하지 않아 당밀과 시럽을 이웃 국가로부터 수입해야 했다.

 

 1895년 마르티니크인들은 프랑스에서 양질의 럼을 홍보하기 위해 대부분의 아그리꼴 럼 증류업자들을 한데 모았다. 그것은 수출된 럼이 사유지의 사탕수수에서만 나오고 외국 당밀이 포함되지 않았음을 보증하는 자체 원산지 증명서를 설정하기로 했다. 프랑스 본토에 설립된 상점들은 고객들에게 럼이라는 이름만 있는 이 기발한 스피릿을 판매하기 위해 노력했다. 입법자는 럼과 타피아를 천연 알코올로 분류하고 법률을 제정했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독일군이 프랑스의 주요 사탕무 생산 지역을 점령하면서부터 급속도로 설탕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식민지의 농장주들에게 럼이 아닌 설탕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으며, 유럽의 다른 국가로의 수출을 제한하는 대신 높은 가격을 약속했다. 설탕은 기본 필수품으로 간주되어 낮은 세금이 부과되었다. 럼의 수익성이 더 높아지면서 증류소를 갖춘 설탕 공장들은 사탕수수를 얻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졌다. 마르티니크에서의 설탕 생산은 4년만에 반토막이 났다.

 

 전쟁은 식민지 성장의 중요한 원동력이었으며, 마르티니크 전체 수출 품목에서 럼의 지분은 최대 84%까지 증가했다. 마르티니크 증류소는 정류(Rectifier) 또는 다중 통과(Multi-Pass) 방식을 사용하지 않아 최대 70 ~ 75%의 알코올만 생산할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럼 가격이 폭락하자, 식민지 농장주들과 상인들은 어려운 시기를 겪기 시작했다. 1930년대 위기 동안 마르티니크의 아그리꼴 럼 생산량은 당밀 기반 럼(Industrial) 생산량과 거의 같아졌다.

 

 1940년대 이후, 사탕수수 주스는 위생상의 이유로 가열에 의해 안정화되었고, 정제되지 않은 시럽으로 환원되었으며, 선별된 효모가 첨가되었다. 럼 생산자들은 에나멜 처리된 커다란 금속 탱크를 입수할 수 있게 되자, 신선한 사탕수수 주스 발효에 대한 여러가지 방향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1931년 네송(Neisson) 증류소와 사유지가 르 까르베로 이전했다. 1941년 마르티니크에는 여전히 194개의 럼 증류소가 있었지만, 현재는 9개만이 살아남았다.

 

 

네송 & 도멘 티외베르(Neisson & Thieubert)

Distillerie Neisson / Domaine Thieubert 1922년 장(Jean Neisson)과 아드리앙 네송(Adrien Neisson) 형제는 르 까르베(Le Carbet) 마을에 위치한 도멘 티외베르(Domaine Thieubert) 20헥타르의 부지와 저택을 인수했다. 두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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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까지 마르티니크의 아그리꼴 럼은 세계 럼 생산량의 약 5%를 차지했다. 당시 아그리꼴 럼 생산자들은 두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다. 다양하고 많은 증류주가 프랑스에 침투했으며, 낮은 인건비와 값싼 원료(당밀)로 승부를 보는 자메이카나 쿠바 같은 나라에 경쟁력이 밀리는 것이었다.

 

 마르티니크 아그리꼴 럼의 법적 보호를 위해 생산자는 제품의 고급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1975년 첫 번째 AOC 요청은 실패했으나, 실패를 발판삼아 1993년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를 발촉했다. 이들은 AOC 사양을 작성했으며, 사탕수수 재배에 대한 지리적 한계와 아그리꼴 럼 제품을 특성화하기 위한 표준 생산 기술(증류기, 숙성, 발효)등을 정의했다. 라 모니(La Mauny)의 전 관리자이자 마르티니크 럼 생산자 조합의 회장이었던 장 피에르 부르디용(Jean-Pierre Bourdillon)은 AOC 자격을 얻기 위해 22년간 투쟁했다.

 

 1996년 마르티니크의 아그리꼴 럼(Rhum Agricole)은 마침내 AOC(Apellation d'Origine Contrôlée) 라벨을 획득하여 프랑스의 샴페인(Champagne), 꼬냑(Cognac), 아르마냑(Armagnac), 깔바도스(Calvados) 등과 같이 법적으로 보호받으며, 독자적이면서도 지역적인 색채를 가진 품목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AOC 외에 프랑스/유럽 연합 차원으로 IGP(Indication Géographique Protégée) 또는 GI(Geographical Indication)라는 지리적 표시를 시행하고 있는데, 마르티니크에서 아그리꼴 럼 외에 당밀 기반 럼을 생산하는 르 갈리옹(Le Galion) 증류소가 이 규정을 따르고 있다.

 

 

르 갈리옹 (L'Usine Sucrerie-Distillerie du Galion)

L'Usine Sucrerie-Distillerie du Galion (SAEM) 통칭 갈리옹 공장(L'Usine du Galion)은 포르 드 프랑스(Fort de France)에서 마을로 진입하기 약 1km 전인 트리니떼(Trinité)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마르티니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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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그리꼴 럼의 글로벌 시장은 2030년까지 약 2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칵테일의 인기 증가와 함께 프리미엄 및 숙성 럼에 대한 수요 증가로 인해 아시아 태평양 및 라틴 아메리카와 같은 신흥 시장에서 소비가 증가했다. 현재 전체 럼 시장 대비 아그리꼴 럼은 약 10% 내외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마르티니크의 역사와 럼 (History of Martinique)

Martinique 서인도 제도 및 앤틸리스 제도에 속하는 대부분의 섬들과 마찬가지로 130년경 남아메리카의 아라와크족(Arawak)이 마르티니크 섬으로 이주해 왔다. 295년 Pelée 화산의 폭발로 인구가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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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

 

 

L’Histoire du Rhum | Rhum Agricole

Jean-Baptiste Labat (1663 – 1738, missionnaire dominicain, botaniste, explorateur, ethnographe, militaire, propriétaire terrien, ingénieur et écrivain), appelé plus communément Père Labat, part volontairement en mission aux Antilles le 28 novembre

rhumagricole.ch

 

L’Histoire de la canne | Rhum Agricole

Néolithique (-9000 à -3300 ans av. J-C) Originaire de Mélanésie (pour l’espèce Saccharum Spontaneum) et de la Nouvelle-Guinée (pour les espèces S. Robustum, et S. Officinarum, qui seraient issues de la S. Spontaneum), la canne à sucre, avec les m

rhumagricole.ch

 

Rhum Agricole

A shrinking market share In 1990, rhums market share was down to 5% on the French spirit market1. Rums have a 11% share of the worldwide spirit market and are the third most sold spirit just behind whisky and brandy. On the other hand, it is the best selli

www.rhum-agricol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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